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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 제1차 천안문 사태)이란, 1976년 4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천안문 광장에서 같은 해 1월 8일 사망한 저우언라이[각주:1] 추모를 위해 바친 화환이 베이징시 당국에 철거된 것에 격앙된 민중이 시위대 공인과 충돌, 정부에 폭력적으로 진압된 사건 또는 이 진압에 앞서 이루어진 학생이나 지식인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활동을 포괄한다.


1989년 6월 4일에 일어난 1989년 톈안먼 사건과 구별하기 위해 제1차 천안문 사태라고도 한다.


1. 사건의 배경


- 1971년 린뱌오[각주:2] 실각 이후, 마오쩌둥[각주:3]문화 대혁명의 과도함을 바로잡기 위해 추방된 덩샤오핑[각주:4]을 당 중앙부로 불러들여 저우언라이와 공조해 국력 부흥을 맡겼으나 장칭[각주:5] 등 문혁 강경파 4인방과 덩샤오핑, 저우언라이와의 대립이 빚어지면서 정치 정세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마오쩌둥은 건국 이래 저우를 실무 능력 있는 부하로 중용해 왔지만, 저우의 신중한 태도나 문화 대혁명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에 마오 자신의 회의적인 성격까지 겹치면서 점차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됐다.


그러나 린뱌오가 죽은 뒤, 당을 총괄할 인재가 부족해지자 마오는 어쩔 수 없이 저우를 서열 제2위로 삼았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저우는 린뱌오 사건 이후의 혼란을 재빨리 수습했고 1972년 리처드 닉슨[각주:6]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는 세계적 주목을 받으며 저우언라이는 국제적 평가가 날로 높아져 갔으나, 오히려 마오의 질투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1973년 7월, 마오가 문혁 4인방 중 한명인 왕훙원[각주:7]과의 담화에서 [(주) 총리의 담화는 정말 가관이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앞으로 반드시 수정주의가 나올 것이다]며 사사건건 비판을 강화해 나갔다. 원래 고지식한 저우는 오로지 충성스러운 태도로 때로는 자기비판을 하며 헤쳐나갔지만, 마오는 점점 저우에 대한 불신을 키우면서 4인방을 앞세워 견제하거나 같은 실무적 관료 덩샤오핑을 복권해 저우의 대신으로 삼으려 하는 등, 대립은 점점 깊어져 갔다.


한편, 중국 국민은 계속되는 문화 대혁명의 혼란에 염증을 느껴 문화 대혁명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던 저우를 존경하였으며 그를 공자에 빗대어 비판하고 실각을 꾀했던 4인방의 비림비공 운동[각주:8]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도 그 원인이었다. 사람들은 저우와 덩샤오핑을 사태를 수습해 줄 인물로 반기며 4인방에 반감을 품었다.


1974년 9월 30일, 건국 25주년 기념식에서 저우언라이는 문혁으로 실각한 사람들을 특별히 불러 모아 극찬을 받았다. 이것은 마오에게 최적의 공격 구실이 될 것이었지만, 조심스러운 저우는 건배할 때 미리 마오를 찬미하는 말을 해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여기에 마오도 [저우에 대한 것을(공격) 포기하진 않았지만, 지금은 시기가 나쁘다. 자각이 희박한 국민은 주변의 일을 모른다. 지금 하면 혼란이 온다]며 공격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고, [저우에게 반(反)하면 백성이 돌아선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저우는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1976년 1월, 저우언라이의 죽음은 중국 내부에서 큰 슬픔을 일으켜 저우를 평가하고 4인방을 공격하는 대자보가 나돌기 시작하는 등 문혁의 광풍 당시엔 있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장칭을 포함한 4인방은 이런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2. 경위


- 문혁의 실패를 걱정하던 마오는 백성들의 저우에 대한 추모와 존경심이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왜 내가 그의 장례식에 나가야 하지? 나는 참가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누가 그에게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을 보냈는가! 난 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열 번도 넘게 투쟁한 거야. 억지로 하라곤 말하지 않겠지만, 다른 정치국원은 참석하라]고 했고 다른 정치국원들은 장례 참석을 중단해야 했다.


이에 문혁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두려워한 마오는 사태 수습을 위해 장칭 일파에 대한 접근을 꾀하기 위해 화궈펑[각주:9]에게 장칭 일파와의 연대를 명령하거나, 덩샤오핑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4인방은 반격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76년 2월, 4인방 중 한사람인 야오원위안[각주:10]은 저우에 대한 공격적인 기사를 냈고 3월에는 상하이 발행인 문회보(文匯報)에는 저우의 추모 기사가 삭제됐으며, 대신 주자파라고 비난하는 기사가 실렸고 동시에 칭화대학생이 저우를 [최대 주자파]라고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자 4인방은 해당 기사 내용을 높이 평가해 시민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태가 급변했다.


1976년 3월, 난징에서 발생한 저우의 추모 집회와 4인조 비판 운동이 4인조의 필사적인 은폐와 방해를 넘어서 베이징으로 비화된 것이 발단됐다. 난징에서 베이징행 열차에는 인민의 궐기를 호소하는 구호가 쓰여 베이징 시민들을 고무시켰으며, 이렇게 3월 말 천안문 광장에서는 추모 집회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형태로 벌어졌다. 참가 시민의 수는 날로 늘어서 무수한 화환과 추도, 4인조에 대한 비판 시문 등이 인민영웅기념비에 바쳐졌다.


특히 4월 4일은 청명절로, 이날은 중국에서 예부터 [죽은 자에 대한 추도일]로써 2만 명 가까이 되는 군중이 모였다. 사람들은 화환과 시를 바칠 뿐만 아니라 4인방을 비판하는 연설과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민중가요인 인터내셔널가(L'Internationale)를 부르는 등 기세를 올렸다. 


며칠 전부터 4인방의 지시를 받은 공안부의 단속이 화환 철거와 가두선차 경고, 설득과 구금 등의 형태로 시작됐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으며 급기야 단속에 나서는 경찰관과 병사들까지도 사람들의 열기에 감화되어 단속을 그만두고 시위에 참가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4인방은 당 중앙을 움직이며 이를 반혁명 행위로 규정하고 실력행사에 나선다. 


다음날인 5일 오후 9시 35분쯤, 광장을 포위한 민병·경관대가 군중을 습격했다. 당국은 [이 소동으로 388명을 체포하였고, 사망자는 제로]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희생자나 체포자는 불명으로 당시 베이징시 제1서기로 진압을 책임졌던 우더는 사후 출판된 회고록에서 진압 과정을 상세히 서술, [폭력의 발생은 면하지 못했지만, 나는 책임지고 말할 수 있으며 사망자는 없었다]며 밝히고 있다.



▲1976년 4월 5일, 천안문 광장 인민영웅기념비에 몰려든 시민들의 모습



3. 영향


- 사건 발생 후 4인조 중 한 명인 야오원위안은 인민일보에 [반혁명 정치사건]으로 민중반란이라고 포장했다가 오히려 국민적 분노를 샀으며, 4월 12일 인민일보 본사에 [어느 현장노동자 민병]이란 이름으로 편집장을 [괴벨스]라고 야유하며 [경악할 일이다! 당의 기관지는 타락했다! 파시즘 메가폰으로 내려앉았다]고 쓴 항의 글이 쇄도했다.


반면 장칭은 사건 보고를 받은 뒤 흥분해 땅콩과 돼지고기로 축배를 들면서, [나는 언제든지 몽둥이로 반대할 놈들을 때려눕히겠다]라며 큰소리쳐 주위의 빈축을 샀다.


사건 후, 덩샤오핑이 책임을 추궁당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실각하였고 4인방이 사실을 왜곡해 마오쩌둥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마오쩌둥은 정말로 반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착각했고 이후 탄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4인조를 비판하는 베이징 사람들의 움직임은 중국 전 국토로 퍼졌으며 마오도 그해 9월에 사망하면서 4인조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 周恩来, 1898~1976 [본문으로]
  2. 林彪, 1907~1971 [본문으로]
  3. 毛泽东, 1893~1976 [본문으로]
  4. 邓小平, 1904~1997 [본문으로]
  5. 江青, 1914~1991 [본문으로]
  6. Richard Milhous Nixon, 1913~1994 [본문으로]
  7. 王洪文, 1935~1992 [본문으로]
  8. 批林批孔运动: 1974년 1월18일부터 6월까지 중국 공산당의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한 정치운동, 명목상으로는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축출하려는 4인방의 음모였다. [본문으로]
  9. 华国锋, 1921~2008 [본문으로]
  10. 姚文元, 1931~200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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