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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토(大和)는 일본제국 해군이 건조한 야마토급 전함 1번 함으로, 2번 함 무사시와 함께 사상 최대인 46cm 포를 탑재한 초대형 전함이었다. 구레 해군공창에서 건조되었으나 1945년 4월 7일 보노미사키 해전에서 침몰하였다.
1. 개요
- 전함 야마토는 야마토급 전함의 1번 함으로, 야마토의 함명은 나라현의 옛 구니(国) 이름인 야마토국, 혹은 일본의 옛 이름, 별칭, 아칭에서 유래한다. 함명은 메이지 1·다이쇼 시대 2의 해상방어함/특무함 야마토에 이어서 두 번째다.
야마토는 전함 사상 최대 배수량에 사상 최대인 46cm 주포 3기 9문을 갖추고, 방어 면에서도 지휘계통이 집중된 중요구획에서는 대 46cm 포를 방어한 군함이었다. 설계는 물론이고, 블록 공법 채택 등 시공에서도 당시 일본의 모든 조선 기술이 총집결되었다. 그러나 그 존재와 특히 46cm 주포 탑재가 최고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건조 때부터 은닉에 주력했고, 완공이 며칠 지나면서 이미 전시 중이었던 점과 패전 전후에 설계도를 포함한 많은 기록이 소각되는 바람에 그 모습을 담은 현존 사진은 이름값에 비하면 매우 적다.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인 1941년 12월 16일에 취역, 1942년 2월 12일 연합함대 기함이 되었고 6월 상순 미드웨이 해전이 첫 출격이 되었다. 그리고 1943년 2월, 사령부 설비에 개량이 이루어진 동형함 무사시가 트럭 섬에 진출하자 무사시에게 연합함대 기함 임무를 이양했으나 그해 말, 야마토는 수송작전 중 미국 잠수함의 뇌격으로 일부 파손한다. 3수리·개장 후, 1944년 6월 혼작전과 필리핀해 해전에 참가했으며, 같은 해 10월 중순 이후 첩1호 작전에서 미군의 호위 항공모함 부대에 대해 46cm 주포 포격을 시행했다. 4
1945년 4월 7일, 천1호 작전에서 제2함대 기함으로 휘하의 제2 수뢰전대와 함께 오키나와 방면으로 출격했지만, 미군 기동부대의 맹공격을 받아 보노미사키 앞바다에서 격침되었다. 5
일본 위키에서는 대공방어와 대수뢰 방어 양면에서 특공 작전만 펼치지 않았으면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방어력과 대공능력은 일본 전함 중 탑이었으나, 한심한 전함 운용으로 당시 국가 예산의 1%에 달하는 귀중한 전함을 허무하게 잃었다.
2. 연혁·생애
- 건조: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실효를 1년 앞두고 있던 1937년, 실효 후 미·영국 해군이 건조할 신형 전함에 대항할 수 있는 함선을 일본 해군에서도 건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 군령부는, 함정 본부에 주포로 18인치 포(46cm)를 장비한 초대형 전함의 건조 요구를 내놓았다.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설계된 것이 [A140-F6], 훗날 야마토형 전함이다.
A140-F6형은 2척의 건조가 계획되었으며, 각각 [제1호함], [제2호함]으로 가칭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미 항공기를 주력으로 해야 한다는 항공주병론이 제창되기 시작했기에 항공주병론 장교들로부터 이러한 대형함의 건조가 비판받고 있었으나 1937년 8월 21일, 요나이 미쓰마사 6 해군대신으로부터 제1호함 제조훈령 [관방기밀 제3301호(官房機密第3301号)]가 나왔고, 5년 후인 1942년 6월 15일을 완성기일로 제1호함의 건조가 시동 되었다.
같은 해 11월 4일에는 히로시마현 구레시의 구레 해군공창의 도크에서 기공이 시작되었고, 야마토 건조를 위해 기존의 도크를 확장해 길이 314m, 폭 45m, 깊이 11m로 개조시켰다. 영국이나 미국에 야마토를 초월하는 전함을 만들지 못하도록 건조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설계자들에게 수교된 사령조차 그 자리에서 회수될 정도로 보안유지에 철저했고 함의 성능도 의도적으로 작게 등록되었다.
상기했듯이 기밀유지는 매우 엄중했다. 조선소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는 판자로 만든 담이 설치되었고, 도크엔 함선의 길이를 알 수 없도록 절반 길이의 지붕을 설치하였으며 주위에는 어망 등에 사용되는 종려나무를 이용한 가리개가 전면에 설치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전국에서 엄청난 양의 종려나무를 극비리에 사재기했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극심한 공급부족과 가격 급등을 초래해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건조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엄격한 신상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자신의 담당 이외 부서에 대한 정보는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조선소 자체가 엄격한 기밀유지를 위해 군의 관리 감독하에 놓였으며 건조 도크를 내려다보는 산에서도 헌병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 관계자들 사이에서 거대 전함 건조 사실 자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이 기밀유지에 대해서 많은 관계자가 너무 지나쳤음을 지적하고 있다.
1940년 3월 3일, 해군은 마루3계획(マル3計画) 1호함의 함명 후보로 [야마토(大和)]와 [시나노(信濃)]가 있었는데 3월 6일 당시 덴노인 쇼와 7는 야마토를 선택했다. 당시 군함의 명명은 해군대신이 다수의 후보를 선정하고, 최종적으로 덴노의 치정을 받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8천황의 결정에 따라 요시다 젠고 해군대신은 제1호함을 야마토로 명명했으며 또한, 같은 날짜에 마루 3계획의 각 함명으로 9무사시(2호함), 쇼카쿠(3호함, 翔鶴), 즈이카쿠(4호함, 瑞鶴)도 결정되었다.
▲1941년 9월 20일, 야마토 전함의 모습
같은 해 8월 8일 진수되었으나 문자 그대로 진수된 것이 아니라, 도크에 물을 주입하고 나서 예인선에 의해 인출하는 형태로 행해졌다. 게다가 기밀유지로부터 그 진수식은 공표되는 일도 없었으며, 고관 100명과 진수작업원 1,000명이 지켜보는 것만으로 전함 진수식이 행해졌다. 원래 쇼와 덴노가 해군병학교의 졸업식 참석이라는 명목으로 야마토 진수식에 행차할 예정이었으나 쇼와의 매제인 구니 아사아키라 해군대령 임석하에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10
해군대신대리로 식에 참석한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 중장은, 그때까지 가칭인 1호함으로 불리고 있던 이 거함을 처음으로 야마토라고 불렀다 11. 조선 관계자는 가쓰라기급 슬루프 2척 12이 이미 폐함이 되어 있었기에 신형 전함의 함명을 야마토로 예측, 13가시하라 신궁과 황궁에 있는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가 그려진 아리타 전통 도자기 아리타야키(有田焼)로 만든 풍경(風磬)을 500개 제작, 관계자에게만 배포했다. 그리고 8월 11일 귀경한 구니 아사아키라는 덴노에게 야마토 진수식에 대해 보고했다.
한편, 야마토는 1942년 6월 준공을 목표로 의장 공사를 벌였으나 일본 해군은 해당함의 완성 시기를 앞당기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1941년 10월 18일, 도사 앞바다에서 속력 27.4노트(약 시속 51km)를 기록, 이어서 30일에 27.46노트를 기록하였고 11월 25일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시찰, 1412월 7일 스오나다에서 주포사격을 시행했으며 12월 16일부로 정식 준공되어 같은 날 제1함대에 편입되었다. 함정 종류별 등급표에도 [야마토급 전함]으로 등록되었으며 야마토의 1/500 모형은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 관람 후 해군성에 인도되어 해군함정본부의 금고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15
야마토에는 당대 최신 기술이 많이 적용되어 있었다. 일본 해군의 군함에선 처음으로 조파 저항을 깨뜨리는 구형 함수를 이용하여 속력 향상을 꾀했으며, 굴뚝 등에 대한 벌집 구조의 장갑, 거대한 관측용 레인지파인더 등 진수 시에는 세계 최대이자 최신예 전함이었다. 취역 초기 레이더는 장착되지 않았으나 그 후, 관련 장비가 장착되었다.
- 연합함대 기함: 1942년 2월 12일, 야마토는 연합함대 기함이 되었다. 참모들은 그때까지 기함이던 나가토에 비해 현격히 향상된 쾌적한 본함의 거주성에 기뻐하였고, 3월 30일 거리 38,100m에서 46cm 주포사격훈련을 시행한다. 제2함대 포술참모였던 후지타 마사미치는 야마토의 주포사격을 보고 1942년 5월 11일 자신의 일기에 [이미 (해당) 전함은 유용한 병종에 있지 않으며, 지금 존중받는 것은 단지 종래의 타성, 우상 숭배적 신앙을 얻고 있다]고 남겼다.
5월 29일 야마토는 미드웨이 해전에 따라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이 승선하여 하시라지마 정박지를 출항하였으나, 후방에 있었기 때문에 야마토가 직접 미군과 포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그 뒤, 6월 10일 미군의 잠수함에 대하여 2번 부포와 고각포를 발포했으며 6월 14일 하시라지마에 다시 복귀한다. 이때, 야마토가 기동부대와 동행하지 않은 것은 전쟁 전부터 존재한 함대 결전사상과 마찬가지로 항모는 전위부대, 전함은 주력부대라는 사상 아래 병력배치를 했기 때문이다.
1942년 8월 7일, 미군이 과달카날 섬에 내습하면서 과달카날섬 전투가 시작되었고, 8월 17일 야마모토 이하 연합함대 사령부를 태운 야마토는 항공모함 다이요(大鷹), 제7구축대와 함께 솔로몬 방면의 지원을 위해 하시라지마를 출항한다. 16
8월 21일, 그리메스섬 부근을 항행하다 동부 솔로몬 해전이 발발한다. 항공기 수송을 위해 2척을 라바울로 향하게 한 후, 3척 17은 8월 28일 추크 제도의 트럭 섬에 입항하다가 입항 직전 야마토는 미국의 잠수함 18플라잉피쉬(Flying Fish)로부터 어뢰 4발을 맞았는데, 2발은 자폭, 1발은 회피하였다.
그 후, 트럭 섬에서 대기했으며 최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헨더슨 기지 함포 사격에 참가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취소되었다.
- 1943년의 야마토: 1943년 2월 11일, 연합함대 기함 임무는 야마토급 전함 2번 함인 무사시로 변경되었고 2월 20일에는 제8방면 군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19 육군 중장이 야마토를 방문하여 연합함대 수뇌진과 남동방면 20 작전에 대해 간담하였다. 이때 제8방면군은 해군의 잠수함 수송을 의뢰했고 5월 8일, 항공모함 2척 21, 중순 2척 22, 구축함 4척 23과 함께 트럭 섬을 출항, 각 함은 18일에 구레와 요코스카의 모항으로 돌아왔고 야마토는 구레에서 대공 무기를 증강, 21호 대공전탐과 22호 대공전탐 등 레이더를 장착한다.
8월 16일, 아마토를 포함한 주력 부대는 구레를 출격해 트럭 섬으로 향한다. 솔로몬 제도에서는 격전이 벌어져 전황이 악화하였지만, 야마토는 트럭 섬에서 하염없이 머문 채 실전에 참가할 수 없었는데 높은 거주성과 식사 등으로 우대를 받는 것으로 타함의 승무원이나 육군 장병으로부터 [야마토 호텔]이라는 야유를 받고 있었다. 작전 행동을 끝낸 구축함이 야마토 바로 옆에 대고 구축함 승조원이 야마토의 거대하고 정돈된 목욕탕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0월 중순, 드디어 마셜 제도에 대한 출격명령이 내려졌다. 미 해군의 기동부대가 마셜로 향할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함 무사시 이하, 야마토, 나가토 등의 주력부대는 결전의 각오로 트럭 섬에서 출격했으나 나흘 동안 적은 오지 않았고, 10월 26일 트럭 섬으로 귀항한다.
1943년 12월, 야마토는 육군독립혼성제1연대를 뉴아일랜드 섬으로 수송하는 임무에 참가하였고 구축함 아키쿠모(秋雲), 타니카제(谷風), 야마구모(山雲)와 함께 요코스카에서 트럭 섬까지 수송을 담당했다. 그리고 12월 12일 6척의 함선과 함께 트럭을 출발, 17일 요코스카에 귀착했다. 24
12월 20일, 인원과 화물을 탑재하고 야마토, 야마구모, 타니카제는 요코스카를 출항했지만, 12월 25일 야마토가 트럭 섬 북서쪽 150리에서 미국의 잠수함 스케이트(USS Skate, SS-305)로부터 어뢰 공격을 받아 주포 3번 포탑 우현에 어뢰 1발을 피격당했다. 그로 인해 4도의 경사가 생겼으나 약 770톤의 주수로 복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속력 20노트 전후로 트랙 섬을 향했으며 어뢰 명중의 충격을 느낀 사람은 없었고, 약간 기울었기 때문에 이상을 알았다고 한다. 이때 곧바로 어뢰 명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탑승한 육군 병사가 충격에 놀라 소란을 피웠다는 승조원의 증언도 남아 있다.
폭발의 충격으로 인해 현 측 수선 장갑 배후의 지지 늑재 하단이 안쪽으로 밀려들어 스프린터 종벽의 조인트가 날아가 기계실과 3번 포탑 상부 화약고에 누수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침수량은 3,000~4,000톤으로 적탄이 수선강 하단 부근에 명중하면 침수를 일으킬 가능성은 장갑의 실사시험에서 지적되고 있었으나 중대한 결함으로는 인식되지 않았다.
공작함 아카시(工作艦)에 배속되어 있던 조선사관에 의하면, 트럭 섬에 정박한 직후 야마토는 아카시에게 [우현 후부에 원인불명의 침수가 있어 조사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의뢰, 공작부원들은 주배수 계통의 고장을 의심했으나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잠수 조사를 했는데 우현 후부에 길이 10여m, 폭 5m의 어뢰 파공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그후, 야마토는 트럭 섬에서 응급 수리를 받은 뒤 본토로 귀환을 명령받았다.
▲1944년 10월 24일, 레이테만 전투에서 미군기 폭격에 대하여 회피 기동을 취하는 야마토
- 레이테만 전투 전까지: 1944년 1월 10일, 야마토는 트럭 섬으로 출발, 15일 세토 내해에 도착했다. 어뢰 피격으로 밝혀진 결함에 대해 침수 범위를 좁히기 위한 수밀 격벽이 추가되었다. 이 공사와 동시에 양현 부포를 철거하고 고각포 6기와 기총을 증설하여 대공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스케이트에 의한 뇌격 2개월 후 트럭 기지 정찰 비행에서 촬영된 네거티브 필름상에 낯설고 거대한 함선의 그림자를 발견한 미군은 포로 심문으로 그것이 야마토·무사시라는 신형 전함으로 주포에 대해서도 45cm(17.7인치) 등,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4월 22일 야마토와 중순양함 마야(摩耶)는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세토 내해를 출격했다. 여기서 야마구모와 하야시모는 일정 거리 호위 후 다시 돌아갔으며, 야마토는 4월 26일 마닐라에 도착하였고 29일 다시 출발해 5월 1일 링가 정박지에 도착했다. 5월 4일, 제1함대 사령관 우가키 마토메 25 중장은 나가토에서 야마토로 승선하여, 야마토가 제1함대 기함이 되었다. 26
6월 14일 인도네시아 비악 섬에 상륙한 미군을 요격하기 위해 혼작전에 참가하였으나, 미군이 사이판에 상륙함에 따라 작전은 중지되었고 작전부대는 북상해 오자와 기동부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6월 15일, 필리핀 해 해전에 참가하였고 야마토는 구리타 다케오 중장이 지휘하는 전위 함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여기서 6월 19일, 전위함대 상공을 통과하려던 일본 측 제1차 공격대를 미군기로 오인, 주위 함정과 함께 사격해 여러 대를 격추하는 바보짓도 저질렀고 이날 일본군 기동부대는 미국 잠수함의 뇌격으로 항공모함 2척 27까지 잃었다. 28
6월 20일, 야마토는 미군의 공격대를 향해 삼식탄 27발을 쏘았는데 야마토가 실전에서 주포를 발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6월 24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0일 정도 체류 후 육군 장병과 물자를 탑재하여 제4함대, 제7함대, 제2수뢰전대와 함께 싱가포르로 향한다.
7월 16일, 제1함대, 구축함 3척 29은 링가 정박지에 도착하였고 이후 3개월간 훈련과 함께 10월에는 갑판을 검게 칠하였다. 30
- 레이테만 전투: 1944년 10월 22일, 야마토는 해전에 참가하기 위해 제1함대 기함으로서 미군 상륙 선단의 격파를 목표로 브루나이를 출격했다. 그러나 23일 이른 아침에 제2함대 기함인 중순 아타고(愛宕)가 미국 잠수함의 뇌격으로 격침되었기 때문에, 야마토에 승선한 제1전대 사령관 우가키 중장이 일시적으로 지휘를 맡았다. 저녁에 구리타 중장이 옮겨 타면서 제2함대 기함이 되었지만, 2개의 사령부가 동거했기 때문에 함교는 답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24일 시부얀해에서 미군 함재기의 폭격으로 야마토의 자매함인 무사시가 격침되었는데, 이때 야마토도 함전부에 폭탄 1발이 명중되었다. 그리고 25일 오전 7시, 사마르 섬 앞바다에서 미국 호위 항공모함 함대를 발견해 다른 함정과 공동으로 수상 사격에 의한 공격을 시행했다. 이 전투에서 야마토는 주포탄을 32,000m 원거리에서 104발 발사하였는데, 이 포격에 대해 미군의 호위항모 칼리닌 베이(USS Kalinin Bay)는 [사거리는 정확하지만, 방위가 나쁘다]라고 평가절하했다.
미국 전사 연구가 Robert Lundgren의 연구에 따르면, 이 해전에서 야마토에 의한 포격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 호위 항공모함 화이트플레인스(USS White Plains, CVE-66): 지근탄이라고는 하지만, 선체가 크게 흔들렸고 기관실이 파괴되었다.
- 구축함 존스턴(USS Johnston, DD-557): 46cm 포탄 3발, 15cm 포탄 3발 피탄.
사마르 섬 해역 포격전 후, 구리타는 근처에 미국 기동 부대가 존재한다는 오보를 받아 레이테 만에 돌입하는 일 없이 반전(反轉)을 명했다. 훗날 우가키 중장의 저술에는 당시 야마토 함교의 혼란이 묘사되어 있으며, 되돌아가던 중 브루나이 부근에서 미 육군 항공대가 공격을 하러 왔다. 잔탄이 적기 때문에 근거리로 끌어당겨 대공 공격을 시도, 여러 대를 격추했다.
왕복 항정에서 미군기의 폭격으로 제1포탑과 배의 상단 갑판에 4발의 폭탄이 명중하였으나, 전투를 계속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장갑이 너무나도 두꺼웠기 때문에 오히려 파편으로 인한 사상자가 몇 발생하였고, 제2포탑장이었던 오쿠다 특무소령의 수기에 의하면 폭탄이 명중한 충격으로 제2포탑원의 대부분이 뇌진탕을 일으켜 쓰러졌다고 한다. 또한, 갑판 상단의 폭탄으로 묘쇄고에 수면 아래의 파공을 발생시켜 앞부분에 3,000톤의 침수, 뒷부분에 경사 복원을 위해 2,000톤을 주입하였다.
10월 28일, 야마토는 브루나이에 도착했고 11월 8일 오르모크만 전투에서 연합군 공군의 주위를 끌기 위해 브루나이를 출격, 11일에 귀항했으나 특별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1월 16일, B-24 폭격기 15대의 습격에 대해 주포로 응전, 3대를 격추한다.
11월 23일, 구레에 도착하였고 우가키 중장은 퇴함, 모리시타 노부에 31 5대 함장을 대신하여 아루가 코사쿠 32 대령이 6대 함장이 되었다 33.
야마토의 자매함인 무사시의 침몰은 야마토급 전함을 불침함이라고 믿었던 많은 승조원에게 충격을 주었고, 머지않아 야마토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각오하는 자도 있었다. 우가키 중장은 일기에서
오호라, 내 반신을 잃었도다! 정말로 면목 없는 바이다.
그렇지만 그 희생은 야마토의 대신이 될 수 있다.
오늘은 무사시의 비운이 있어도 내일은 야마토의 차례다.
라고 썼다.
레이테 해전의 패배로 일본 연합함대는 사실상 궤멸했다. 야마토급 전함 3번함을 항모로 개조한 시나노도 미국 잠수함의 뇌격으로 침몰했고, 결국 야마토와 시나노는 합동조차 못 했다. 게다가 야마토 이하 잔존 함정은 연료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된 훈련도 하지 못하고, 본토 대기만 계속하고 있었다.
1945년 3월 19일, 하시라지마에 있던 야마토는 미국 함재기의 공습을 받아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이 공습에 대해 해군에서는 연구회를 가졌고 한층 더 맹훈련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나왔으나 이것도 연료 부족으로 생각대로 할 수 없었다.
1945년 3월 19일, 구레 항에 적 함재기가 습격했다. 야마토는 사전에 아키나다로 나갔으나 공격을 받았고 직격탄은 없었지만, 측거의가 고장 나 양륙 수리가 필요했다. 그 후, 이미 안전한 장소가 없어진 구레 항에서 도쿠야마 앞바다로 피난했다.
3월 30일, 미군에 의해 구레 항과 히로시마만이 1,034개의 기뢰로 가득 차면서 기뢰 제거에 시간이 걸려 구레 항으로 귀환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고 간몬 해협은 27일 미군에 의해 기뢰봉쇄를 당해 통행불능이었다.
- 해상 특공 준비: 4월 2일, 제2수뢰전대 기함인 경순양함 야하기(矢矧)에서의 제2함대 막료회의에선 다음 3가지 방안이 검토되었다.
1. 항공작전, 지상작전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돌입전을 강행, 수상부대의 마지막 해전을 시행한다.
2. 호기가 도래할 때까지 최대한 일본해(동해) 조선 남부 방면으로 피한다.
3. 상륙 가능한 무기, 탄약, 인원을 상륙하여 육상 방위 병력으로 하고 나머지를 부포대로 한다.
한편, 연합함대에서는 연합함대 참모인 가미 시게노리 대령이 야마토에 의한 해상 특공 34을 주장했다. 연합함대의 구사카 류노스케 35 참모장이 달랬으나 가미 대령은 [ 36야마토를 특공적으로 사용할 때]라며 군항에 계류되어 있을 야마토를 제2함대에 편입시켰고, 갑론을박 끝에 4월 5일에 야마토는 연합함대로부터 오키나와 해상 특공 명령을 받는다.
4월 5일,
[전령작 603호] (발신시간 13시 59분): 8일 여명을 목표로, 급속 출격 준비를 완성하라. 부대 행동 미소해면 대잠소탕을 실시하게 하라. 31전대 구축함으로 규슈 남방 해면까지 대잠, 대공경계에 나서라. 해상 호위대 장관은 부하 항공기로 규슈 남쪽, 남동쪽 해면의 색출, 대잠 경계를 전개한다.
[전령작 611호] (발신 시간 15시): 해군 부대 및 6항군은 오키나와 주변의 함선 공격을 한다. 육군도 이에 호응해 공격을 시행한다. 7일 날이 밝으면, 분고 수도(豊後水道)로 출격, 8일 여명에 오키나와 서쪽 해면으로 돌입하라.
4월 6일,
[전령작 611호 개(改)](시각 07시 51분): 오키나와 돌입을 야마토와 2수전, 야하기+구축함 8척으로 고친다. 출격 시기는 제1유격부대 지휘관 소정으로 하여 분고 수도 출격 시간은 제2함대에 일임되었다. 37
제2 함대는 같은 날 저녁, 천1호 작전으로 야마구치현 도쿠야마만 바다로부터 오키나와를 향해 출격한다. 이 작전은 광휘의 제국 해군 해상 부대 전통을 떨쳐 일으킴과 함께, 그 영광을 후세에 전한다.
야마토는 천호 작전에서 오키나와까지의 편도 연료밖에 싣지 않고 출격했다는 주장이 존재했지만, 기록과 증언에서 약 4,000(만재 6,500)톤의 중유를 싣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에서도 야마토 출격 시 연료 탑재량은 4,000톤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며,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출격 전에 연료 담당 동료를 만나 주위 탱크 등으로부터 수집하여 총 4,000톤 정도 야마토에 탑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제2함대는 야마토 이하, 제2수뢰전대, 제41구축대 38, 제17구축대 39, 제21구축대 40로 편성되었다. 41다만, 선도했던 대잠소탕대의 제31전대 42 3척은 숙련도 미숙으로 판단해 분고수도를 통해서 구레로 회항시켰다.
천1호 작전의 개요는 미군이 상륙한 오키나와 방위의 지원, 즉 미 해군의 요격 전투기를 야마토 쪽으로 관심을 돌려서 일본 측 특공기에 대한 교전을 완화하는 것이었고 오키나와의 일본 육군 제32군은 연합 함대의 요청에 따라 4월 7일로 예정되어 공세를 취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고로 야마토를 좌초시켜 육상포대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좌초 시의 선위가 거의 수평일 것, 주포를 발사하기 위해서 기관 및 수압계와 전로가 살아 있고 사격 관제 기능이 전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현실을 보면 미군의 제해권·제공권을 돌파해 오키나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항공특공을 지원하기 위한 [희망 없는] 양동작전이었다. 전쟁 말기 일본 해군의 암호는 이미 미군에 거의 해독되어 있었기에 출격은 통신 첩보에서도 확인되었고, 분고 수도 부근에서 미군의 잠수함에 모든 행동을 들킨 상태였으며 4월 6일 21시 20분, 미군의 잠수함은 야마토를 확인했고 특별한 암호도 없이 [야마토]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전보를 보냈다. 해당 전보는 야마토와 야하기에 근무하고 있던 영어가 능숙한 일본계 2세 통신 사관에게 감청되어 번역, 전함에 전달되었다.
애초, 미 해군 제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대장은 전함에 의한 요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토가 서진을 계속했고 동해 쪽으로 대피할 공산이 있는 것, 야마토를 격침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마크 밋처 43 중장이 지휘하는 기동 부대에 항공 공격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44
그러나 실제로는, 스프루언스 대장이 전함에 의한 포격전을 준비하고 있던 것을 밋처 중장이 먼저 공격 부대를 보내 버렸다. 이것은 무사시가 잠수함의 뇌격으로 침몰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어떻게든 야마토만큼은 항공 공격만으로 격침하고 싶었다고 하며 또한, 밋처 중장은 각 부대의 보고로부터 야마토가 오키나와에 돌입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스프루언스에 알리지 않은 채 공격부대의 편성을 시작했다.
▲미군의 집중 공격을 받는 야마토
- 야마토의 최후: 4월 7일 06시 30분경, 야마토는 대잠초계를 위해 0식 수상정찰기(Aichi E13A, 零式水上偵察機)를 발진시켰고 이 비행기는 가고시마현 이부스키 기지로 돌아갔다. 규슈 근해까지는 레이테만 해전에서 야마토에 승함했던 우가키 중장이 이끄는 제5항공함대 제203항공대의 0식 함상 전투기가 함대의 호위를 했다.
한편, 미군도 08시 15분에 3대의 그러먼 F6F 헬캣(Grumman F6F Hellcat) 색적대가 야마토를 발견했고 8시 23분, 다른 헬캣 색적대도 야마토를 시인했다. 해당 헬캣대는 주변의 정찰대를 모았고 동시에 PBM 마리너(Martin PBM Mariner)도 감시에 가담하자, 야마토는 주포 이외의 대공화기로 포격했으나 미국 정찰기를 물리치지 못했다.
4월 7일 12시 34분, 야마토는 가고시마현 보노미사키 앞바다 90해리 지점에서 미국 해군 함상기를 50km 떨어진 곳에 발견하고 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8분 후, 항공모함 베닝턴(USS Bennington, CV-20)의 제82폭격기 중대(11대) 중 SB2C 헬다이버 급강하 폭격기(Curtiss SB2C Helldiver) 4대가 함미로 급강하하면서 중형폭탄 500kg 폭탄 8발을 투하하였고, 야마토는 이 공격으로 후부 지휘소, 13호 전탐, 후부 부포가 파괴된다. 45
전해지는 얘기로는 야마토의 주포가 한발 맞았고, 동시에 후부사격 지휘소(후부함교)가 파괴되었다. 더욱이 중갑판에서 화재가 발생하면서 건조 당시부터 약점으로 문제 되었던 부포 주변부의 명중탄에 의한 화재는 침몰할 때까지 진화되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미군의 전투기, 폭격기, 뇌격기가 야마토에 대해 동시 공격을 가했으며 여러 방향에서 다수의 어뢰가 발사되는 데다 전투기와 폭격기에 시달리면서 대처했기 때문에 거대한 야마토는 제대로 된 회피는커녕, 그대로 미군의 먹이가 되었다.
13시 2분, 2차 공격이 시작됐다. 미군 공격대 94기 중 야마토에 59기가 향했으며 야마토는 반격에 나섰으나 역부족이었고, 또 다른 공격대가 야마토 함미에서 급강하하여 폭탄명중으로 야마토의 마스트를 쓰러뜨린다. 야마토는 직격탄과 화재로 미군의 비행기를 확인하는 것조차 곤란했고, 1~2차 공격으로 어뢰만 30발 가까이 맞았고 통신시설 등 각종 장비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고, 13시 30분 또 다른 항공모함의 공격대 105대가 야마토 상공에 도착, 13시 42분부터 무지막지한 폭격을 퍼부었다.
야마토는 다수의 폭탄에 직격탄을 맞았고 함 내에서는 화재가 발생했으며, 함상에서는 폭탄의 직격탄과 미군 전투기의 기총 소사, 로켓 공격으로 대공 무기가 파괴되고 사상자가 속출한다. 게다가 물밑에서는 미군의 고성능 폭약을 탑재한 어뢰가 좌현을 다수 명중시킨 결과 복원성 상실과 조함 불능을 일으켰는데, 오죽하면 도대체 몇 개의 어뢰가 명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공격을 받아냈다.
선체는 점점 기울어졌고, 그 영향으로 야마토에 탑재된 각종 포들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로 인해 미군은 쉽게 야마토에 어뢰를 명중시킬 수 있었고 14시가 넘어서자 야마토는 이미 조함 불능 상태였다. 14시 15분, 경보 버저가 울리면서 모든 탄약고에 온도상승을 나타내는 빨간 램프가 켜졌으나 이미 대처할 인원도, 시간도 없었다. 14시 17분까지, 야마토는 미군 항공대 386대, 혹은 367대에 의한 파상 공격을 받았으며 전투기들도 폭탄과 로켓탄을 갖추고 기총 소사까지 더해져 야마토의 대공 화력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46
마지막으로 여러 발의 어뢰가 야마토의 우현을 명중시킨 뒤에는 20도, 30도, 50도로 급격히 경사가 발생한다. 아리가 함장은 나침의를 잡은 채 야마토와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최후를 맞이했고, 그 외 다수의 참모진도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14시 20분, 야마토는 천천히 옆으로 기울고 있었고 함교 주변의 난간에는 승조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14시 23분, 상공의 미군 공격대 지휘관들은 야마토의 완전한 전복을 확인하였고 [그릇을 뒤집듯이 뒤집혔다]라는 목격담이 있다.
야마토는 직후,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선체가 3개로 동강 나며 해저로 가라앉았다.
▲야마토의 폭발 순간을 담은 사진, 이 폭발 후 야마토는 해저로 가라앉았다.
야마토의 침몰 시간을 군함 야마토(大和) 전투상보와 제17구축대 전시일지에서는 14시 23분, 제2수뢰전대 전투상보는 14시 17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폭발로 인해 날아가 버린 파편은 해면의 생존자 위에 쏟아지면서 그로 인해 목숨을 잃은 승조원도 적지 않았다.
14시 50분, 후유츠키와 유키카제가 야마토의 생존자 구조를 시작, 16시 반 경에 마무리되었다. 야마토의 사관이 [아직 생존자가 남아 있다]라고 구조를 호소했지만, 일몰이 가까워져 잠수함의 행동이 활발해질 우려가 있기에 거기서 중지되었다. 실제로 복귀 도중에 잠수함을 만났으나 두 함 모두 피해는 없었으며, 4월 8일 오전 구조한 야마토의 생존자와 함께 사세보로 입항했다.
야마토에서는 이토 세이이치 제2함대 사령장관, 아리가 함장(중장) 이하 2,740명이 전사, 생존자 269명 47으로 제2수뢰전대 전투상보에 따르면 준사관 이상 23명, 하사관병 246명, 제2함대 사령부 4명, 하사관병 3명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미군의 피해는 6대가 추락, 5대가 귀환 후 파기, 47기가 피격되었다. 48
4월 9일, 아사히 신문은 1면에서 [오키나와 주변의 적중으로 돌격/전함을 비롯한 공수전군 특공대]라고 보도했으나 야마토의 이름과 세부사항은 밝혀지지 않았고 나중에 전쟁이 끝나서야 일본 국민은 야마토의 존재를 알게 된다.
야마토의 침몰 소식은 스즈키 간타로 수상 등 내각 일동에게 전해져 일본의 패전이 이젠 현실임을 인식하게 된다. 그야, 일본의 자존심이자 상징이 그렇게 허무하게도 해저 밑으로 가라앉았으니 말이다. 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