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70주년,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70년, 현재도 이 땅에 남아있는 상흔
- 6월 25일, 6.25 70주년을 맞이한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초기에 일어난 비극적인 전쟁으로, 한국전쟁은 당시의 국제정치와 어떻게 얽혀 있었을까?
"한반도를 마주하는 데 있어서, 동아시아를 둘러싼 국제 정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게이오 명예 교수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1945~).
미국 등의 외교문서를 분석, 2차대전부터 6.25 전쟁,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무대로 한 국제정치를 연구해온 오코노기에게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을 물었다(아사히 신문).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북경계를 이루고 있던 북위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입하면서 6.25는 발발했다. 미국 중심의 유엔군이 한국 측, 중국군이 북한 측에 각각 참전하였고, 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립되면서 38선 부근에 군사분계선을 둘 것과 각각 2㎞씩 비무장지대(DMZ)를 두기로 했다.
유엔군을 대표하는 미국과 북한·중국이 서명했으며, 휴전을 [종전]으로 전환하는 대화가 다음 해인 54년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파담, 법적으로는 전쟁 상태로 6.25 전쟁은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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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한국전쟁이 남북을 가른 것뿐만이 아니라, 2차대전 말기의 국제정치가 분단을 결정했다. 1945년 8월,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2발 투하가 결정타가 되어서 항복했다.
미국은 같은 해 11월, 미나미큐슈에 상륙하는 올림픽 작전(몰락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일본 육군은 [미군이 일본에 상륙하지 않고, 계속 원폭을 투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쫄아서) 본토 결전(1억 총 옥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반면 소련은 같은 해 4월, 독일과의 전쟁(독소전쟁) 종식 후 3개월의 준비를 거쳐 대일(対日) 참전했다. 우선 만주의 중심부를 침공한 다음, 9월 후반 랴오둥반도와 한반도, 쿠릴 열도 등을 침공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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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이 몇 달 일찍 완성했다면 일본의 항복도 빨라졌을 것이고, 한반도는 미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을 것이다. 반대로 원폭 완성이 몇 달 더 늦어졌다면 올림픽 작전을 시행하는 미군이 병력을 할애하지 못하는 동안, 한반도는 소련에 지배당했을 것이다.
이 경우, 소련은 태평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 라페루즈 해협을 포함한 홋카이도의 북쪽 절반을 점령해 일본이 오히려 분단의 쓰라림을 당했을 수도 있어 6.25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 미 육군부 대령 3명이 38선을 제안했지만, 한반도의 역사와 지정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과거 한반도 북쪽 절반을 지배한 세력은 동해 측의 원산과 서해 측의 남포를 잇는 선보다 북쪽, 지리적으로는 북위 39도선 이북을 세력권으로 했다.
일본군도 2차대전 말기, 39선을 넘어 남쪽에 주둔하는 17 방면군을 대미(対米)전으로, 북측 34군을 소련과의 전투에 각각 대응하도록 편성했다.
39도선에서 분할될 경우, 북한 소속은 전통적인 8도 중 2도에 불과하며 북한 지배하에서 강원도와 곡창지대인 황해도가 빠진다. 군사적으로도 남하하는 북한군의 진격로가 된 지역에서 만약, 그곳들이 빠졌을 경우 6.25 한국전쟁을 개전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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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했지만, 6.25 전쟁 개전 반년 전에는 미국이 군사 개입하는 범위를 알류샨 열도에서 일본-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삼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다.
당시 미군의 해공 전력은 압도적이었고, 한반도에 군사거점을 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애치슨 라인이 태어났었음에도 미국이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뮌헨의 교훈]이다. 1938년 뮌헨 회담에서 나치 독일에 유화적인 자세를 보였던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1940) 영국 총리의 자세가 제2차 세계대전을 불렀다는 반성이다. 공산주의의 세계 침략에 반격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6.25 한국전쟁이었다.
두 번째는 국제연합의 위신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한국은 1948년 유엔 선거 감시단이 지켜본 선거를 통해 탄생했다. 미국은 전후 질서의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했던 유엔의 위신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셋째가 동맹에 대한 신뢰 유지다. 미국이 6.25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면 일본과 독일은 미국이 동맹국을 지키지 않으리라 의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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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후 소련은 일본이나 독일로부터 다시는 침략당하지 않도록 안전보장 환경을 구축하려 했다. 유럽에서는 폴란드, 아시아에서는 북한이 중요했는데 소련은 북한에 친소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고 한반도 통일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기에 당연히 6.25 한국전쟁도 생각이 없었다.
1949년경부터 스탈린(Joseph Stalin, 1878~1953)은 김일성(1912~1994)의 6.25 한국전쟁 준비 움직임을 용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역사의 수수께끼 중 하나인데,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북한이 승리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소련의 국제적인 위신을 아시아에서 높이거나 일본에 큰 충격을 주거나 하는 목적이 있었다는 설이나, 6.25 한국전쟁으로 한반도를 희생해 미국의 군사력을 아시아에 고정해 유럽에서의 안전 확보를 도모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 한반도는 근현대사에서 국제적 세력 다툼의 무대로 계속 이어져 왔다. 일본이 한반도를 강탈한 동기도 서구 열강처럼 부를 수탈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반도가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 지배는 [병합]이었다. 일본 영토를 확대하고 타민족을 동화시키려 했으니 같은 문명권에 있는 국가의 처사로는 상당히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독일과 소련 간의 폴란드 분할 병합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후 한반도에서는 친미적 개화파인 이승만(1876~1965) 등 보수 민족주의, 임시정부를 중국에 수립한 김구(1976~1949) 등 진보 민족주의 세력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 등 서로 대립했다. 6.25 한국전쟁은 그 결과이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이나 중국의 국공내전처럼 근현대사에서 내셔널리즘의 통합은 혁명이나 내전에 의해 달성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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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국 미·중의 참전을 초래했고, 6.25 한국전쟁은 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오늘도 보수(우익)와 진보(좌파)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수많은 사람이 구속된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1918년 3·1 운동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재평가를 열심히 하는데, 이것도 국내적 정치투쟁의 목적으로 여기에 이 같은 주장은 반일을 소재로 하면 설득력이 붙는다.
진보세력의 친일 청산 주장은 말로는 반일(反日)이지만, (모든 것이) 일본을 향한 것은 아니다. 남한의 진보세력은 범민족적 관점에서 남북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뿐이지, 레드팀(북한)의 일원 같은 건 결코 아니다.
북한이 붕괴하지 않는 배경에도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그치지 않는 사회주의·민족주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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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에 들어서도 북한의 군사도발은 멈추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주한미군 축소론이나 한일방위협력 정체 등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6.25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에 의한 상호 억제 체제를 만들어냈으며, 북한은 그 틀 속에서 청와대 피습사건과 KAL기 폭파사건 등 전쟁까지 도달하지 않는 저강도 군사도발을 계속했다.
소련 동구권 붕괴로 한때 체제 위기에 빠졌지만, 최근에는 핵무기나 탄도미사일을 통한 억지력 강화를 통해 전략 환경이 변화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한국에 대한 단거리 탄도미사일과 다연장로켓포 등 새로운 무기체계도 상호억제체제를 미묘하게 변화시킬지 모른다. 북한이 그것을 시도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Donald John Trump, 1946~)에 의해서 혹시나 주한미군이 철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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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과거 냉전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분위기도 있어 주한미군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일본 일각에서 [한국 없이도 일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다. 애치슨 라인은 실패 사례다.
한일안전보장은 비대칭적인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한국의 안전은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와 사세보, 요코스카 등에 지켜지고 있는데, 만약에 부산과 가까운 진해 해군기지에 중국 군함이 입항하거나 서울 남쪽의 평택 공군기지를 러시아 공군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사태는 상상만 해도 무섭다. 그때 와서 일본의 방위예산을 몇 배로 늘려도 돌이킬 수 없다.
6.25 한국전쟁의 상흔은 70년이 된 지금까지도 한반도에 지울수 없는 상흔으로 깊게, 그 흔적이 패여있다.
오코노기 마사오: 1945년 군마현 출생으로, 69년 케이오 대학 법학부 정치 학과졸업, 72년 연세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으로 교환유학, 85년 게이오대 법대 교수, 2011년부터 14년까지 규슈 대학 특임 교수, 한일 포럼 일본 측 좌장.
전문은 현대 남북한 정치론 및 국제정치론(現代韓国·北朝鮮政治論及び国際政治論). 저서로 한국전쟁(朝鮮戦争), 한반도 기원, 독립과 통일의 상극(朝鮮分断の起源 独立と統一の相克)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