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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는 해외 위키 및 다양한 자료 번역을 토대로 작성된 콘텐츠입니다.


- 오카다 유키코(岡田 有希子, 1967년 8월 22일 - 1986년 4월 8일)는 일본의 아이돌, 가수, 여배우로 본명은 사토 카요이며 애칭은 [윳코(ユッコ)]다.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태어나 나고야시 아쓰타구에서 자랐으며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선 뮤직에 소속되어 있었다. 


1980년대 중기에 활동한 아이돌 가수 중 한 명이며, 일본의 전설적인 아이돌 [포스트 마츠다 세이코]로서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으나 인기 절정이었던 1986년, 돌연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그 충격적인 사건으로 젊은이들의 잇따른 극단적 선택은 당시 일본 내에서 큰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이 현상을 [윳코 신드롬(ユッコ・シンドローム)]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애



- 성장: 1967년 8월 22일,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난다. 모친의 제왕절개가 검토될 정도의 난산이었는데, 미숙아 출산으로 인한 생명의 위험이나 뇌장애의 가능성도 있었으나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이 영향이었는지 유년기 시절, 언어장애는 아니었으나 일본어의 [(さ)]을 전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69년, 2살 때(나이 기준은 만 나이) 나고야시 아쓰타구에 이사했고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언니가 다니고 있던 YMCA의 체육 교실에 다니기 시작하는데 자신에게 운동신경이 없음을 자각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을 동경해, 초등학교 4학년부터 수채화를 배우기 시작한 유키코는 5학년 때 아사히 신문사 주최의 사생 대회에서 입선하였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쓰타 신궁의 사생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중학생이 되자 유화나 전통그림, 데생을 배우기 시작해, 다빈치나 르누아르의 모작을 자주 하곤 했다. 중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과제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던 가수 카와이 나오코[각주:1]의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 중학교 내의 전람회에서 금상을 획득한다[각주:2].




- 연예계로 입성: 한편, 그 나잇대의 여자아이답게 연예계에도 동경을 하고 있던 유키코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합창부에 들어갔고, 초등학교 6학년 땐 현지의 TV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학예회의 음악극 [우라시마 타로]에서 오토히메 역을 맡아 교장이 뛰어 보러 왔을 정도였다. 유키코는 그 배역을 맡기 위해,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연구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학생이 되자 예능이나 드라마 등, 여러 가지 오디션에 응모하여 엑스트라 같은 단역을 맡던 유키코는 1981년 8월, 언니가 구독하고 있던 오분샤의 잡지 [고1시대(高一時代)]에 실려 있던 오디션 [니콘 프레시 걸 콘테스트(ニコン フレッシュギャルコンテスト)]에 응모, 준 그랑프리로 뽑히면서 사진은 월간지 샤라쿠(写楽) 1982년 3월호에 실렸다.



1982년 6월, 작년에 응모했던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탄생!(スター誕生!)]의 예선모임 통지가 주쿄 TV 방송으로부터 도착했다. 이것은 유키코가 목표로 정해두었던 [중학교 2학년 출전, 3학년 때 데뷔한다]는 계획으로부터 1년 늦은 통지였다. 


담임 선생님이 반대하는 가운데, 학교를 무단결석하면서 나고야 지구 예선에 출장한 유키코는 키타하라 사와코[각주:3]의 마이 보이프렌드를 불러 당당히 결선 대회 티켓을 따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가족에게도 반대를 받자 12월에 있던 결선 대회는 단념, 방에 틀어박히며 며칠 동안 단식에 들어갔을 정도로 본인의 연예계에 대한 열망은 컸다.


며칠 뒤, 연예계 진입의 조건으로 [학내 테스트 학년 1등], [중부 통일 모의고사 학내 5등 이내], [제1지망 학교에 합격할 것]이라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어머니로부터 제시받았으나 맹 공부 끝에 놀랍게도 모두 달성했다. 게다가, 예선을 지켜봤던 하고 있던 예능 사무소 선 뮤직 전무인 후쿠다 토키오와 해당 프로그램 프로듀서까지 가족을 설득하자, 1983년 3월의 결선 대회 출전이 허가되었다. 


3월 30일에 열린 스타 탄생! 제46회 결선대회에서 유키코는 나카모리 아키나[각주:4]의 슬로우 모션을 노래했으며, 결과는 후일 발표되었다[각주:5].


1983년 4월, 코요 고등학교(向陽高校)에 입학한 유키코는 그로부터 얼마 후, 결선 대회의 [합격]이 전해지면서 상기한 선 뮤직과 대형 영상·음악 소프트 제작사인 포니 캐년(ポニーキャニオン)과의 계약도 이루어지면서 연예계로 입성하게 된다.




- 오카다 유키코 탄생: 1983년 7월 17일, 나고야를 거점으로 하는 영능력자 겸 작명가 오키 히로코[각주:6][각주:7]에 의해 예명으로 [오카다 하루코(岡田晴子)], [오카다 카요코(岡田佳代子)], [오카다 유키코(岡田有希子)]가 후보에 올랐는데 [하루코]는 선 뮤직의 선배 가수인 쿠와타 야스코[각주:8]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 [카요코]는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뽑히지 않았고 최종적으로 [희망을 품는다]라는 의미로 [오카다 유키코]라는 예명이 정해졌다.


8월 25일 상경한 유키코는 선 뮤직 사장의 집에서 하숙했다. 이곳에는 1년 선배인 쿠와타 야스코, 유키코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 합격자인 타키 사토미[각주:9]가 있었으며 다키와 룸메이트가 되었다.


연예계에서의 목표는 [야마구치 모모에[각주:10]나 마츠다 세이코와 같이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가 되는 것]이었던 유키코는 9월 1일, 호리코시 고등학교에 편입하였고 10월 16일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탤런트 활동을 개시했으며, 12월 18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 TV 도쿄의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ヤンヤン歌うスタジオ)]를 통해 TV 프로에 오카다 유키코로서 처음 등장한다.




- 아이돌 가수 데뷔: 유키코의 탤런트 활동과 함께 아이돌 가수 데뷔 준비가 진행됐다. 캐년 레코드의 프로듀서 와타나베 유조[각주:11]는 유키코의 이미지를 [도쿄 6대학 야구 대회를 보러 가는 야마노테(山の手) 아가씨]로 정하고, 데뷔곡의 제작을 유명 싱어송라이터인 타케우치 마리야[각주:12]에게 의뢰, 학원 연애 3부작 및 10대의 사랑을 테마로 합계 6곡이 제공되었으며 1983년 12월 10일, 타케우치도 코러스로서 참가한 가운데 첫 레코딩이 행해졌고 데뷔곡은 1984년 1월 11일, 트랙 다운되었다.


1984년 1월 10일, 젊은 남성을 위한 정보잡지 [스콜라(スコラ)]로부터 아이돌로서 첫 취재를 받았고, 3월 11일 도쿄 메이지 신궁 회화관 앞 라디오 이벤트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선다. 그 후 3월 20일부터 4월 8일까지 티파티 형식의 팬 교류회 [모여라 유키코 프렌즈(集まれYukikoフレンズ)]가 나고야를 시작으로 전국 7개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3월 25일 음악 프로그램 [더 히트 스테이지(TBS)]와 4월 14일 [양양 노래하는 스튜디오], 음악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아이돌 펀치(TV 아사히)]에서 가수로서 처음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4월 21일, 싱글 [퍼스트 데이트(ファースト・デイト)]로 가수 데뷔한 유키코의 캐치프레이즈는 [언제까지나 함께 있어 줘], [멋진 나라에서 온 리틀 프린세스]


데뷔 후 그라비아 잡지 취재, 캠페인, 라디오 게스트 출연 등 아침 10시부터 밤 11시까지 빡빡한 연예 활동을 시작한 유키코는 가수 데뷔 후 선 뮤직의 선배 마츠다 세이코와 비교되면서 [포스트 세이코 제1후보] 로 불리게 된다. 그에 반해 유키코 본인은 [나는 나이기 때문에 마츠다 세이코의 흉내는 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했으며, 인터뷰에서 [목표로 하는 가수는 누구인가?]라고 질문받자 [오카다 유키코]라고 대답하였다.


빡빡한 일정이었으나 활동은 순조로웠고, 7월 29일에는 요미우리 랜드에서 4,000여 명의 팬과 결성식을 가졌으며 9월 24일과 9월 30일에는 도쿄에서 자신의 첫 콘서트를 성공시켰다. 음악 프로그램에서도 10위 이내에 들면서 승승장구, 그 해 [일본 레코드 대상(日本レコード大賞)]을 포함해 그 외 5개의 음악 시상식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휩쓸면서 성공적인 데뷔를 이루었다.





- 1985-86년 4월 초: 1985년 2월 9일·14일·15일, 화보 잡지 BOMB!와 덩크(슈에이샤)에 의한 장시간 밀착 취재를 받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도중에 병원의 진찰을 받아 감기와 과로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링거를 맞으면서 이벤트를 출연했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프로그램의 녹화, 드라마 촬영, 취재 등에 임하는 유키코의 모습에 덩크의 기자는 [그 바쁜 나날은 우리들의 체력으로는 무리]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빡빡한 일정이었다.


3월 25일부터 5월 26일까지 전국콘서트가 삿포로를 시작으로 전국 13개 도시에서 개최되었고, 이 공연에는 유키코의 어머니와 초등학교 시절의 은사도 찾아왔다고 한다.


6월 5일부터 1주일간,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홋카이도에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3일째인 6월 8일에 유럽으로 출국해 스위스에서 비디오와 사진집, CF 등의 촬영을 하였으며 6월 23일에 귀국, 7월 25일부터 10월 26일까지 전국 콘서트 개최하면서 총 23개 도시에서 공연을 펼쳤다.


11월 5일부터 이듬해 1월 28일까지 방송된, 연속 텔레비전 드라마 [금지된 마리코(禁じられたマリコ, TBS 계열)]에서 첫 주연을 맡았고 촬영은 콘서트 기간 중인 1985년 9월 19일부터 12월 말까지 매일 진행되었는데 이 살인적인 스케쥴 속에서도 유키코는 NG를 거의 내지 않았다고 한다.


1986년 1월 29일, 싱글 [입술 Network(くちびるNetwork)]가 발매되어 오리콘 차트에서 첫 등장 1위가 되었다. 마츠다 세이코 작사에 사카모토 류이치[각주:13] 작곡이라는 이색 콤비에 의해 탄생한 이 곡은 사와구치 야스코[각주:14]를 이미지 캐릭터로 한 화장품 기업 가네보(カネボウ) 봄 캠페인 이미지 송으로 차용됐다.


2월 11일부터 3월 2일까지 악수회 이벤트가 총 5개 도시에서 개최되어 첫날에만 4,000명의 팬을 동원할 정도로 흥행했다.


3월 3일 호리코시 고등학교 졸업, 4월 4일부터 하숙하고 있던 사장의 자택을 나와서 미나미아오야마의 맨션에서 독신 생활을 시작했다. 


4월 5일 전국 콘서트 시작, 4월 5일의 도쿄와 4월 6일의 나고야 2개 도시에서 행해졌으며 4월 10일부터는 아사히TV의 드라마 수록 예정이었다.




- 갑작스러운 죽음: 전국 콘서트가 시작되고 3일 후인 4월 8일, 자택 맨션에서 리스트 컷[각주:15]과 가스를 이용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으나, 2층 위의 맨션 주민이 가스 냄새를 눈치채고 관리인이 110번으로 도쿄 가스에 통보했다. 구조대가 달려갔을 때, 유키코는 벽장 하단에서 웅크려 울고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가까운 기타아오야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예능 사무소에 돌아온 직후인 12시 15분, 유키코는 사무소가 입주해 있는 빌딩(도쿄도 신주쿠구 요쓰야)의 옥상에서 뛰어내려 현장에서 즉사했다. 향년 20[각주:16]살로, 유서로 보이는 연필 편지지가 남아 있었다.


4월 10일, 나카노구의 호센사에서 영결식이 영위되었고, 많은 업계 관계자와 전국의 팬이 참가하였다. 고향인 나고야에서도 4월 15일 영결식이 행해졌으며 묘소는 조만지[각주:17], 법명은 유교인샤쿠니카호(侑楽院釈尼佳朋).


1987년 7월, 선 뮤직 대표 아이자와 히데요시[각주:18]의 명의로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기증되어 무덤 옆에 건립되었으며 오카다 유키코의 친필로 쓰여진 시[각주:19]와 아이자와의 애도의 뜻이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 팬으로부터 헌화가 끊이지 않으며, 매년 기일에는 전국에서 팬이 모여 헌화와 묵념을 하고 주지 스님의 법회가 2006년부터 이어지고 있다.



▲오카다 유키코의 기념비, 지금도 팬들의 헌화가 이어지고 있다.




- 각계의 반응: 1986년 4월 8일, 사건 직후 현장에 출동한 호치 신문 기자와 리포터의 취재에 대해 선 뮤직 전무 후쿠다 토키오는, [오카다가 무엇으로 고민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정의 기복이 심한 아이였다]라고 대답했다. 한편, 아사히신문은 담당자가 모두 오카다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극단적 선택 시도 발각 시점에서는 기사를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 


같은 날 밤에 방송된 보도 프로그램 아사히 TV 계열의 뉴스 스테이션에서는, 오카다의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프로그램 종료 시에 메인 캐스터가 [연쇄 반응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오늘은 극단적 선택의 보도를 삼갔습니다]라고 코멘트했다.


그 다음 날인 4월 9일부터 모든 방송국에서 사건이 대대적으로 다루어졌는데, 시청률과 자극적인 화제에만 치중한 보도 프로그램과 와이드 쇼는 현장에 쓰러진 유키코의 시신까지 방송했기 때문에, 당시 시청자에게 충격을 주었고 후에 [윳코 신드롬]이라고도 불리는 젊은이의 잇따른 죽음이 이 무렵부터 현저해졌다.


연예계에서도 유키코가 출연했던 양양 노래 스튜디오를 프롯해 음악 프로그램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추모 특집이 방송되었고, 유키코와 같이 호흡을 맞추었던 동료 연예인들도 그녀와의 추억과 인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추모했다.


유키코의 죽음은 국회에서까지 거론되어, 당시 문부과학성 대신인 가이후 도시키[각주:20]가 답변할 정도로 매우 큰 이슈였다.


(그외 나머지 상세한 에피소드는 이곳을 참고하세요)



  1. 河合 奈保子, 1963~ [본문으로]
  2. 그녀는 해당 작품을 카와이에게 보내볼까 진지하게 생각해봤다고 한다. [본문으로]
  3. 北原佐和子, 1964~ [본문으로]
  4. 中森 明菜, 1965~ [본문으로]
  5. 12월에 있던 결선대회와는 다른 결선대회다. [본문으로]
  6. 沖紘子, 연예계와 정재계 유명인사들 사이에 초능력자로 알려졌으며, 특히 마츠다 세이코의 대모로 유명했다. [본문으로]
  7. 게다가 연예인 50여명의 예명을 본인이 지어주었고, 이 중에는 80년대를 대표한 아이돌이나 탤런트들이 많았다. 그 중 한명이 바로 마츠다 세이코. [본문으로]
  8. 桑田靖子, 1967~ [본문으로]
  9. 滝里美, 1964~ [본문으로]
  10. 山口百恵, 1959~ [본문으로]
  11. 渡辺有三, 1949~2014 [본문으로]
  12. 竹内まりや, 1955~ [본문으로]
  13. 坂本 龍一, 1952~ [본문으로]
  14. 沢口靖子, 1965~ [본문으로]
  15. Wrist cut syndrome: 손목을 베는 증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놓인 사람이 자해 행위를 반복하는 현상. [본문으로]
  16. 만 18세 [본문으로]
  17. 成満寺, 아이치현 아이사이시 [본문으로]
  18. 相澤秀禎, 1930~2013 [본문으로]
  19. 프라이빗 타임, プライベートタイム [본문으로]
  20. 海部俊樹, 193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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