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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는 해외 위키 및 다양한 자료 번역을 토대로 작성된 콘텐츠입니다.

- 에드워드 4세(Edward IV, 1442년 4월 28일 - 1483년 4월 9일)는 잉글랜드 국왕으로 1461년 - 1483년까지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다만, 1470년부터 1471년에 걸쳐 후술할 내란으로 수개월 동안 잠시 중단되었다.


장미전쟁(1455년 - 1485년/1487년)의 제1차 내란에서 승리함으로써 랭커스터 가문 헨리 6세를 폐위하고 요크 왕조의 시대를 열었고, 킹메이커(Kingmaker)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반란(제2차 내란)으로 인해 짧은 기간 왕위에서 쫓겨나 헨리 6세의 복위를 허용했지만 반격에 성공,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40대의 젊은 나이에 급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튜더가가 요크가를 쓰러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1. 생애



- 성장: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자 요크 공작 리처드[각주:1]와 세실리 네빌[각주:2]의 차남으로 1442년 4월 28일 프랑스 루앙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요크 가문은 왕가인 랭커스터 가문을 제외하면 유일한 에드워드 3세의 남계 후손으로, 형인 헨리 오브 요크는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실질적인 장남이다. 어린 나이에 마치백(웨일스 변경백)에게 서작되어 소년기 대부분을 웨일스 경계지방인 루드로우 캐슬(Ludlow Castle)에서 지냈다.


백년 전쟁의 강경파였던 아버지 요크 공 리처드는 헨리 6세가 중용하는 온건파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각주:3]와 권력투쟁을 격화, 1455년 제1차 세인트올번스전(first battle of st albans)을 일으키면서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내전에 돌입한다. 싸움에 승리하여 서머셋 공을 전사시킨 요크 공 리처드는 호국경(섭정)에 취임하여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헨리 6세의 아내 마가렛 왕비[각주:4]의 반격으로 궁지에 몰렸으며, 1459년 내전을 재개하였다.


러드포드 다리 싸움(Battle of Ludford Bridge)에서 요크군이 패하자 에드워드는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사촌 형과 함께 카루로 도망갔다가 다음 해 1460년 7월 에드워드는 이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가 환영을 받았고, 런던으로 입성해 노샘프턴 전투(Battle of Northampton)에서 랭커스터 군을 격파하고 헨리 6세를 사로잡았다.


런던에 입성한 에드워드의 아버지는 왕위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호국경 연임과 헨리 6세 사후에 왕위 계승자가 되는 것으로 타협하게 되었다. 이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파 토벌을 위해 웨일스로 돌아갔으나, 다음 해인 1461년 초에 아버지 요크 공 리처드와 둘째 동생인 에드문드 백작이 솔즈베리백이 웨이크필드 전투[각주:5]에서 패해 전사한 사실을 알게 된다.




- 즉위: 요크 공작과 아버지의 왕위 청구권을 이어받게 된 에드워드는 급히 군을 소집, 베드포드 공작 재스퍼 투도르와 윌트셔 백작 제임스 버틀러가 이끄는 랭커스터 군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의 전투(Battle of Mortimer's Cross)에서 무찌르고 런던으로 병력을 전진시켰다. 마가렛 왕비의 랭커스터 군은 제2차 세인트올번스전에서 요크 군을 격파하고 헨리 6세를 탈환해 런던으로 진격했지만, 병사들에게 약탈을 허용하는 바람에 신망을 잃어 런던 입성을 거부당하고 만다.


그 사이, 에드워드는 워릭 백작과 합류하여 런던 시민의 환호를 받고 입성하였으며 클러큰웰에서 개최된 요크파 평의회에서 국왕으로 추대되었고, 3월 4일 에드워드 4세로 즉위한다. 얼마 후 새로운 왕과 워릭 백작은 북쪽으로 향했고, 3월 28일 영국 땅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로 일컬어지는 타우튼 전투(Battle of Towton)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랭커스터파인 마가렛 왕비와 에드워드 왕자는 스코틀랜드로 대피, 이어서 프랑스로 도망갔으며 헨리 6세는 1465년 붙잡혀 런던탑에 유폐됐다.


에드워드 4세는 새로운 친족이 된 우드빌 일족을 총신으로 삼고 엘리자베스 왕비의 남동생과 의붓자식은 귀족에게 서작되는 등, 우드빌 일족을 챙겨주었으며 외교정책에선 워릭 백작의 친불정책을 뒤집고 부르고뉴 공작과의 동맹을 원했다. 


우드빌 가문에 대한 세간의 불만은 점차 높아졌고,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의 뜻에 반하여 그의 장녀 이사벨과 결혼한 왕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각주:6]과의 맹약을 맺자 1469년 반란을 일으켰다. 에지코트 무어 전투(Battle of Edgecote Moor)에서 국왕 군은 패배, 에드워드 4세는 허를 찔리고 사로잡혀 미들햄 캐슬(Middleham Castle)에 유폐되었고 장인은 참수되었다.


반년 동안,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의 감시하에 놓였으나 링컨셔에서 반란의 기회로 자신의 군대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루스 코트 필드 전투(Battle of Lose-coat Field)에서 붙잡힌 반란 지도자 로버트 웰리스는 워릭 백작의 관여를 고백했고,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작은 프랑스로의 도피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국왕은 이로써 자신의 안전은 확보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워릭 백작과 클래런스 공은 마가렛 왕비를 중심으로 한 망명 랭커스터파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들의 반격을 받은 에드워드 4세는 저지대 국가(Low Countries)로 도망가야 했다[각주:7]


워릭 백작은 런던탑에 유폐되어 있던 헨리 6세를 복위시켰으며, 여동생 마가렛의 남편 부르고뉴 공 샤를(호담공)은 처음에 원조를 거부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군자금을 제공했다.


1471년 3월, 에드워드 4세와 막냇동생 글로스터 공 리처드[각주:8]는 소군들을 이끌고 요크셔 해안에 상륙했다. 그곳에서 남하해 4월 11일 환영을 받으며 런던으로 들어가 헨리 6세를 다시 런던탑에 투옥하며 복위를 이뤘다. 


사흘 뒤인 14일, 버넷 전에서 승리하면서 워릭 백작을 패사(敗死)시켰고 5월 4일 튜크스베리 전투(Battle of Tewkesbury)에서 랭커스터 군도 이겼다. 생포된 에드워드 왕자는 처형당했고 역시 포로가 된 마가렛 왕비는 나중에 프랑스로 송환돼 사망했으며, 헨리 6세도 런던탑에서 살해됐다. 이로써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권자는 거의 근절되었으며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비로소 굳건해졌다.




- 말년:  에드워드 4세의 지위는 에드워드 왕세자[각주:9]의 탄생으로 강화되었고[각주:10] 적대자들의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왕실 재정도 넉넉해졌다. 


한편 클래런스 공은 에드워드 4세에게 귀순했으나 막냇동생 글로스터 공과의 불화가 생기고 있었다. 클라렌스 공은 워릭 백작의 장녀 이사벨과 결혼하였는데, 글로스터 공도 차녀 앤과 결혼하면서 네빌가의 영지 상속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불화와 더불어 클랜런스 공은 음모에 대한 관여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에드워드 4세를 괴롭힌다. 결국 이 문제는 1478년 클래런스 공이 처형됨으로써 결말을 보게 되었다.


에드워드 4세 치세 후반의 군사적 모험은 1475년 단기간의 대프랑스 전쟁이었으며, 이 결과 에드워드 4세는 피키니 조약(Treaty of Picquigny)을 체결해 잉글랜드가 국력을 충실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조약에 의해 정해진 루이 11세로부터 에드워드 4세에게 지급되는 2만 프랑의 연금은 본국 정부의 재정에 도움이 되었고, 과세를 위해 의회를 여는 불편함도 피할 수 있었다.


말년의 그는 타락하면서 추문에 젖었지만, 런던 시민은 그의 품행에 익숙해져 있었고 궁정의 권력은 우드빌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기에 북부를 통치하는 어려운 일은 글로스터 공에게 맡겨졌다. 


1482년, 루이 11세는 피키니 조약에 위배되어 프랑스 왕세자 샤를과 공주 엘리자베스와의 약혼을 파기하면서 연금의 지급도 정지했다. 에드워드 4세는 재정의 준비를 진행하지만, 그 와중에 병으로 쓰러져 1483년 4월 9일 세상을 떠난다.




- 인물: 에드워드 4세는 신체가 강건했고 나이도 40대에 막 들어섰지만, 아마도 황음[각주:11]과 건강에 대한 부주의로 인해 1483년 4월 9일 웨스트민스터에서 급사하여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St George's Chapel)에 매장되었다.


에드워드 4세는 미남이며 키까지 훤칠해 다수의 여성과 염문이 있었고, 소문으로는 왕이 런던 시내 시찰에 나서면 시민들이 아내를 숨겼다고 했을 정도였다. 청년 시절에는 미남이었으나 전쟁이 없어지면서 몸을 쓰지 않았는지 건강이 좋지 않았고 만년에 비만이 되어버렸다.


에드워드 4세는 애첩을 많이 뒀는데, 가장 유명한 여성은 제인 쇼어(Jane Shore, 1445~1527)와 엘리자베스 루시다. 그리고 우드빌 가문과의 정식 결혼 이전에 그는 엘리노어 탈보트 부인과 약혼했으며, 이 일이 리처드 3세 찬탈의 빌미가 되어 사후에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은 무효로 여겨졌고 둘 사이의 아이는 서자로 여겨졌다.


에드워드 4세의 출생 자체에도 추문이 따라다녔고,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가 어머니 세실리 네빌의 불륜에 의한 사생아이며 클래런스 공이 요크 공 리처드의 정통 혈통이라는 소문을 흘렸고, 이 추문은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 시에도 이용되었다.



  1. Richard Plantagenet, 3rd Duke of York, 1411~1460 [본문으로]
  2. Cecily Neville, 1415~1495 [본문으로]
  3. Edmund Beaufort, 2nd Duke of Somerset, KG, 1406~1455 [본문으로]
  4. Margaret of Anjou, 1429~1482 [본문으로]
  5. Battle of Wakefield, 1460년 12월 30일 [본문으로]
  6. George Plantagenet, 1st Duke of Clarence, 1449~1478 [본문으로]
  7. 1470년 9월 [본문으로]
  8. 훗날 리처드 3세 [본문으로]
  9. 훗날 에드워드 5세 [본문으로]
  10. 망명 중인 1470년 11월 4일 왕세자가 태어났다. [본문으로]
  11. 지나친 여색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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